경험론(經驗論, 영어: empiricism)은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지식이 주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는 이성 중심의 인식론인 합리주의와 대립하는 입장을 취한다. 합리주의가 지식의 원천을 이성에서 찾으려 하지만, 경험론은 인간의 지식이 감각을 통해 얻어지고 경험에 의존한다고 본다. 경험론은 인간의 인식이 기본적으로 감각적 경험에 기반을 두며, 이성이나 선천적 관념보다는 실증적 증거와 감각적 지각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는 많은 철학적, 과학적 입장의 기초를 형성한다.
과학철학에서 경험론은 실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한 지식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험론에 따르면, 과학적 이론과 가설은 추상적인 이성적 추론이나 직관, 계시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 세계에서의 관찰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즉, 과학적 방법론은 경험적 증거에 기초하여 이론을 구축하고 검증하는 실증적인 절차에 중점을 둔다. 고대 그리스의 의료인 중 일부는 이미 경험론적 사고를 채택했으며, 이들은 관습이나 생득적 지식보다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 의학적 진단을 내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피론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경험론이라는 용어는 그들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험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로,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 아무런 선천적인 지식이나 정신적 내용이 없으며,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처음 정립되었으며, 이븐 시나와 같은 중세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븐 투파일은 사고 실험을 통해 이를 더 명확하게 설명했다. 이후 17세기에는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타불라 라사의 개념을 명확하게 발전시켰다.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마치 빈 서판과 같아, 경험이 그 위에 자국을 남기듯 지식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모든 지식이 경험을 통해 얻어지며, 감각적 인상과 반성적 사고를 통해서만 관념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로크의 경험론에서 중요한 점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단순 관념’과 그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복합 관념’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단순 관념은 분석될 수 없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들이며, 복합 관념은 이러한 단순 관념들이 결합하여 물체나 사건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다. 로크는 물체가 가진 주된 성질과 종된 성질을 구분하여, 물체의 본질적인 속성은 주된 성질에 속하고, 색상이나 크기와 같은 감각적 속성은 종된 성질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로크는 감각을 통한 인상에서 비롯된 관념들이 인간의 인식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며,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세계를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펼쳤다.
로크의 경험론에 대한 반응으로,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이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버클리는 로크의 경험론이 결국 무신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며, 사물은 오직 인식된 결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재하는 것은 곧 지각된 것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내세워, 물체는 우리가 지각할 때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버클리에 따르면, 신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을 대신 지각하여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물체는 인식되지 않더라도 신의 지각을 통해 객관적 존재를 유지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후에 주관적 관념론으로 발전하며, 인간의 인식과 세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버클리의 이론은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과 연결되기도 한다. 흄은 로크와 버클리의 주장에 대해 깊이 있는 반응을 보였으며,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적 접근을 발전시켰다. 흄은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인간이 갖는 믿음은 경험적 사실을 넘어서는 이성적 증명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흄은 지식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관념의 관계’로, 이는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명백한 진리들을 포함하고, 두 번째는 ‘사실의 문제’로, 이는 실제 세계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한 믿음들이다. 흄은 "인상"이 감각적 경험을 의미하며, "관념"은 이러한 인상의 희미한 복제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보았고, 이성은 단지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한 반성적 사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흄은 또한 우리가 자연 세계에 대해 믿는 기본적인 믿음들이 이성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대신, 우리의 믿음은 축적된 경험과 그 경험에서 나온 습관적 믿음에 의해 형성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내일 태양이 뜬다"는 믿음은 경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얻어진 결과로, 이는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지만, 우리가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것이다. 흄은 이와 같은 믿음이 인간의 생활과 경험을 지배한다고 강조했으며, 그가 제시한 경험론은 후에 심리학과 사회과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결론적으로, 경험론은 인간이 지식을 얻는 주요한 경로로 감각적 경험을 강조하며, 이는 철학과 과학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이다. 경험론은 합리주의와 대립하는 관점에서, 지식이 이성이나 선천적 원칙이 아닌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는 점을 확립했다. 또한, 경험론은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대 과학의 실증적인 접근 방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경험론은 인간의 지식이 감각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며, 이후의 철학적 논의와 과학적 방법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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